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건축 (문단 편집) ==== 조선의 종교 건축 ==== 사람들이 제일 관심을 두는 것은 1차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규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거대 건축물들은 대부분 왕궁 혹은 종교적 건축물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은 [[경복궁]]과 [[수원 화성]], [[서총대]] 같은 왕궁 또는 왕실에서 주도해서 건축된 건축물들을 제외한 종교적 건축물들 한정으로는 거대 건축 뽕을 빨기는 분명 힘든 환경이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가 곧 국교였으며, 도시 특히 수도에는 도심 한복판 이곳 저곳에 [[황룡사]], [[흥왕사]] 등과 같은 대형 사찰이 있었다. 건국 초기에 [[흥천사]] 사리전각이라는 한양의 위엄돋는 랜드마크격 건축물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 불교는 국교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괴력난신]]이나 신앙보다는 통치 철학에 가까운 유교가 조선의 이념이 되었다. 따라서 사찰은 평지에서 밀려나 산지에서 번성하게 된다. 조선 초기까지 불교에 대한 반발감이 팽배해 [[수양대군|세조]] 사후 노골적인 절에 대한 압박과 심지어는 고의적인 테러가 벌어졌는데, 조선초에 조선왕사라고 불렸던 [[회암사]]는 조선 중기 이후로 몰락한다. 때문에 우리의 거물 판타지를 충족해 줄 거대한 평지 사원은 사라지고 만다. 불교는 평지에서 벗어나 산지에서 살아남는다. 산지의 사찰은 조선 초기의 억불 사상에서 비껴났기 때문에 상당수의 고대 건축이 살아남았다. 이들 건축은 임진왜란 때 대규모로 소실되어 한반도에서 현존하는 고대 건축은 씨가 마른다. 조선 초 이후로 대규모 반달리즘은 사라지며, 불교는 안정기를 찾는다. 그러나 더이상 불교는 탈종교화 되어버린 지배층에게 관심 밖이었으며, 괴력난신을 논한다는 이유로 권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지배층이나(특히 여성) 민간 백성들은 여전히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고, 또 열심히 후원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왕실과 양반계층의 지원을 받은 사찰의 대거 중창된 배경은 이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화엄사, 금산사, 법주사 등의 대형 사찰이 있다. 특히 화엄사 각황전은 숙종이 직접 이름까지 지어주신 귀한 건물되신다. 불교 건축은 이런 여성이나 민간 백성의 후원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왕실은 원찰이나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조포사, 능찰을 대거 건설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당연히 문화재를 보호한단 개념이 없어서많은 사찰 건물들이 전문적인 보호를 받지 못해 쇠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후기로 가면서 절 건축 자체가 유교건축/관청건축과 유사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전자는 [[불국사]]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수원 용주사가 대표적이다. 조선은 종교 건축만큼은 [[단청]] 등 화려한 양식을 허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장식 기술은 더 발전하는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사찰 건축에서는 화려하고 섬세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단청이 목재가 많은 건축물에서 좀이 슬거나 썩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많은 건물에서 단청이 활발히 사용되었다. 특히 산간에 위치한 절이나 궁궐 건축 등에서 많이 사용된 편. 단청 외에도 내부의 종교적 장식은 여전히 화려하다. 오늘날에도 좀 큰 사찰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내부 장식이 화려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